그대, 이 가슴에 품은 꺼지지 않을 불꽃 같은 이여.
아마 저를 기억하지 못하시겠지요.
앙상한 나무 가지가지마다 천제께서 내리신 하얀 꽃송이로 치장하여 동장군께 예를 갖출 적에. 그 장군 걸음하시는 길목길목마다 흰 융단 깔리어 그의 행차를 알릴 적에. 미처 때를 알지 못하고 엄동설한에 깨어난 저는 동장군의 행차에 감사하지 못하는 불청객에 지나지 않았겠습니다. 곁을 스치는 서리바람조차 그런 제게 관심 한 줌 건네지 않았지요.
그 가운데 손을 내밀어 주신 것이 당신이었습니다.
일순 당신을 풍요의 정령이라 착각한 것을 용서하시길. 당신의 발자욱 따라 피어나는 꽃송이가 반가웠던 탓이겠습니다. 저승꽃인가 하자니 옹골진 모양새가 그렇지 않았고, 설중매인가 하자니 그보다도 붉더랍니다. 그 당당한 걸음마다 동장군의 융단이 성큼성큼 붉은 빛으로 수놓이지 않겠습니까. 이윽고 짓궂게 불어치는 서리바람을 무심히 막아선 당신이 저를 들여다 보실 때에야, 저는 그 얼굴을 알아보았습니다.
참혹한 전장에서만 피는 꽃이 있다지요. 불꽃처럼 타오르고, 벚꽃처럼 흩날리고, 드넓은 평야를 다 메울 만큼 흐드러지다 채 수 일이 되지 않아 자취를 감춘다 하는 신기루 같은 꽃이. 한 번 피었다 하면 제아무리 넓은 평야에서도 땅 위의 모든 생을 꺾어 간다 하여 혹자는 비정한 수확자라 부른답니다. 그리하여 그 꽃이 진 자리에는 꼭 지금처럼 점점이 샛붉은 꽃이파리가 떨어져 있다 하지요. 전장의 원혼이 귀가 되어서 그리 부르는지, 귀가 전장에서 원혼을 불러내니 그리 부르는지, 그 전승이 모호할 정도로 참상의 한복판을 누비는 꽃, 전원귀 ■ ■ ■ 이 당신이겠습니다.
아, 그러나 차라리 그대를 꽃으로만 알았다면 이리 가슴 저미지 않았을 텝니다. 여린 꽃 이파리에 빗대어진 당신을 어리석도록 동경이나 하면 그만이었겠지요. 흩날리는 꽃보라라 여겨지던 당신의 머리칼이 원혼의 붉은 절규를 가닥가닥 자아낸 모양새인 줄을, 상아색의 꽃받침이라 여겨지던 뼈 가면이 전장의 공포를 굳혀 뒤집어 쓴 모양새인 줄을, 그리하여 내려다보는 샛노란 시선이 그 어느 겨울보다도 시린 죽음의 빛깔인 줄을 알지 못했더라면, 그 겨울 제게 죽음이란 그저 하늘에서 내리는 흰 수의를 겸허히 받아 입는 일일 뿐이었을 텝니다.
당신이 무심히 저를 들여다보고 지나치셨기에ㅡ, 죽음이 저를 비껴갔기에 저는 봄을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지난 겨울 그리도 매정하던 하얀 적막이 수의가 아니라 봄의 치장을 감춘 면사포였음을 알게도 되었습니다. 허나, 남몰래 그리는 나의 임은 모르시겠지요. 봄바람이 들판에 깔린 융단을 색색이 분칠할 때에도 저는 눈보라 치던 그 날을 그립니다. 당신을 품고 타들어가는 속은 지난 겨우내 추위를 인고하게 하였지만, 이제는 심장을 불사르는 화마가 되어 잿빛 바랜 가슴을 움켜쥐고 당신을 부르짖게 만듭니다.
당신은 저를 기억하지 못하시겠지요. 아마 이 곳에 다시 발길하시는 일도 없을 텝니다.
허면 이 안에 자그마한 불꽃 하나, 어이하여 두고 가셨는지요.
저는 당신이 원망토록 그립습니다.
1,000자 + 커뮤 세계관 + 기본 마감으로 작업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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