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낭만적인 직업이라 그랬지.
그 사람, 소환수를 다양하게 다룰 줄 알거든. 마주칠 때마다 다른 소환수를 데리고 다니는 것 같기도 하고.. 소환수는 주인의 능력이 만족스럽지 않으면 말을 듣지 않는다며? 그 사람의 소환수는 꼭 주인이 말하지 않아도 마음을 다 알고 있는 것 같았어. 손발이 딱딱 맞더라니까. 이야, 엄청 강한 비술사인가보다 했지.
아, 내가 말한 낭만적인 직업이 모험가는 아냐. 뭐, 모험가도 낭만으로 시작하는 사람들도 있지~ 그런 놈들 대다수는 마물들의 저녁거리가 돼버릴 거고 말야. 그 사람도 따지고 보면 위험한 곳에 뛰어드는 사람이지만, 던전같이 위험한 곳에는 갈 이유조차 없을 걸? 거긴 아무튼 사람이 살지 않으니까 말야. 아차차, 내가 아직 그 사람 직업을 말하지 않았던가? 배달부래, 배달부. 편지를 전하는 사람 말야~. 그러니까, 편지 받을 사람이 살아있지 않을 것같은 험지에는 갈 이유가 없지 않겠어.
나도 그 사람 직업이 되게 특이하다고 생각해. 어쨌든 배달부는 모그리들이 하는 일이잖아. 방법은 잘 모르지만 방금 전까지 아무것도 없었던 책상에 뿅 하고 편지를 두고 갈 정도면 뭐, 모그리식 마법이라도 부리는 거 아니겠어? 사람이 그런 것까지 흉내낼 수는 없으니까, 발로 뛰어서 직접 찾아다닐 텐데. 사람끼리 일하는 길 놔두고 어렵게 돌아간다~ 싶었지.
아니, 그런데 그 배달부씨 은근히 인기가 있더라고. 모그리들에 비해 얼굴을 알아보기가 쉬워서 그런가? 심심찮게들 수군거려. 마물 경계초소에 있는 오라버니와 편지를 주고받게 해 줬다던지, 편지만 건네준 뒤에 예의바르게 인사하고 사라지는 통에 말 한 번 붙여 볼 겨를이 없었다던지. 다들 관심이 좀 있는 눈치더라고. 오죽하면, 그 사람을 만나려고 숲의 도시에서 건너온 사람도 있다더라니까. 애타게 찾아다닌다는 것 같은데, 무슨 사연이라도 있으려나.
하하, 남 얘기처럼 말하지만 나도 사람들이 왜 숙덕이는지는 알아. 종종 그 배달부한테 편지를 배달받거든. 나한테도 그 사람이 눈에 확 들어오게 되는 사건이 하나 있었어.
나는 보통 맥주항구에서 일하는데, 그 날따라 하선한 물건 수량이 안 맞는 거야. 하는 수 없이 혼자 남아서 수량을 검토하고 있었거든. 그런데 갑자기 뭔가가 훌쩍훌쩍 뛰어서 이쪽으로 다가오더라고. 으레 그런 일이 생기면 언덕에서 내려온 미친 푸크나 자칼이니까, 칼부터 뽑아 들고 몸을 돌렸는데…
거기에 마물이 아니라, 전신이 오묘하게 빛나는 동물이 펄쩍 뛰어올라 있는 거야. 우리 동료 중에도 비술을 다루는 놈이 있으니까 대번에 소환수인가보다 하고 알아봤지. 나한테 그 순간 중요한 건 사실 그게 아니었어. 그 등에 그 사람이 타고 있더라고.
바람결을 꼬아서 만든 것같은 긴 은발에, 살짝 흩날리는 앞머리 아래로 보이는 동그란 이마에, 지상에 강림한 천사가 내려다보는 것 같은 금빛의 눈동자라던지…등 뒤로는 석양이 후광처럼 비치고 말이야. 너무 아름다운 걸 마주하면 압도되는 기분을 알겠어? 내가 그 때 딱 그랬다니까.
하여간 내가 얼이 빠져 있는데, 그 사람은 바닥에 착지한 뒤에 무심하게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나를 보더라고. “OOO님 되시죠, 편지 왔습니다.”하고.
솔직히 첫인상은 꽤 무서웠단 말이지. 소환수가 펄쩍 뛰어올라 있어서가 아니고, 그 눈매가 말이야. 제법 경력 있는 모험가의 사나운 눈매랑 비슷했다고 해야 하나. 말투도 살갑지가 않고. 엉거주춤 편지를 받는데, 퍼뜩 정신이 드는 거야.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말을 걸어 볼 타이밍은 지금 뿐이다! 하고. 그래서 냉큼 물어봤지. 정식 배달부에요? 어쩌다 배달부가 되셨어요? 하고.
하하, 왜 그 순간에 말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물어보길 잘 했다 싶었어. 무시하고 금방 가버릴 줄 알았는데, 의외로 꼬박꼬박 대답을 해 주더라. 여전히 살가운 말투는 아니었지만 대화하는 게 싫은 것 같지도 않길래 이것저것 더 물어봤어. 나중에는 차라리 나랑 같이 일하지 않겠냐고 했는데, 아쉽게도 그건 거절하더란 말야. 배달부로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서.
그 때 이후로 종종 그 사람에게 편지를 배달받고 있어. 아니, 전속 배달부가 되어 준 건 아니야. 그냥 내가 그만큼 편지를 많이 받거든. 평범하게 모그리 배달부가 올 때도 많아. 한번은 웬 어리숙해 보이는 모그리 배달부가 “너한테는 무슨 편지가 이렇게 많이 오는거냐 쿠뽀~”하고 투정을 부리더라니까. 에구… 미안하긴 한데 어쩌겠냐, 이렇게 해야 그 배달부를 볼 확률이 조금 늘지 않겠어? 으하하, 맞아. 가족들한테 일부러 편지 많이 보내달라고 하는 중이야. 덕분에 정말로 다른 사람들보다는 자주 마주치고 있다고.
…응? 연락수단을 만들면 되지 않냐고? 아, 하하.. 글쎄~ 그렇게까지 친해지진 못한 것 같아서 말야. 둘만의 링크펄 같은 걸 주면 부담스럽지 않을까? 게다가 그거 좀 고.. 고백 같고 말이지. 으하하, 아익, 민망해~..
휴, 실은 그 사람, 나를 기억하고 있는 건지 아닌지 잘 모르겠어. 항상 똑같이 OOO님 되시죠, 하고 인사하니까. 그래도 열심히 아는 척 해서 제법 말은 텄거든. 라노시아 바깥으로도 배달을 하는지, 어떤 배달까지 해 봤는지 물어보기도 했고. 사람끼리만 편지를 배달할 거라는 편견을 갖고 있었는데, 야만족들한테도 편지를 배달한다더라고. 아차, 야만족이 아니라 이제 우호부족이라고 부른다지? 아무튼 그쪽으로 배달 갈 때는 위험한 일도 가끔 생긴다나 봐. 수취인을 찾으러 갔더니 지즈 떼에 둘러싸여서 일촉즉발의 상황이라던지. 이야기만 들었는데도 상상이 가지 뭐야. 우아하게 소환수에게 지시해서 지즈를 단숨에 쓰러트리는 배달부씨 모습이… 그러곤 무심하게 말하겠지? “OOO님 되시죠, 편지 왔습니다.”라고. 아아…언젠가 그 모습을 눈으로 보고 싶어.
그래서 그 때 말하게 된 거야. 그거 참 낭만적인 직업 아니냐고.
위험한 곳에 보내는 편지에는 받는 사람이 무사히 지내고 있기를 바라는 마음도 담겨 있는 거잖아. 배달부씨는 할 일을 한 거라고 말하겠지만, 마침 위험에 빠진 수취인에게 나타나서 편지를 건네주게 된 건 보내는 사람의 무사기원까지 전달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서 그 얘길 하면서 진짜 멋있는 일 하시네요, 라고 말했더니.. 기분탓인지 모르겠는데, 그 말 듣고 조금 뿌듯해하는 것 같았어. 아우라 여성은 무척 작으니까, 왠지 쓰다듬어 주고 싶은 모양새였는데.. 쓰다듬었으면 실례겠지? 크흠, 잘 참은 것 같아.
오늘도 받을 편지가 하나 있어. 대단한 건 아니고, 아마 여동생이 뭐가 먹고 싶다고 투정부리는 편지일 거야. 헤헤, 편지 내용은 아는 거니까 별로 기대되지 않는데… 맞아, 그 배달부씨가 배달해 줄까 봐 마음이 괜히 설레는 거 있지. 항상 한 이때쯤 되면 나타났던 것 같은데~ 오늘은 좀 배달이 많은가? 늦네. 흠, 오늘이야말로 용기 내서 데이트 신청이라도 해 보려고. 큰 맘 먹고 비스마르크 식당의 예약권까지 준비해 놨거든! 이거 엄청 힘들게 얻었어~
그러고보니 당신은 왜 이런 걸 물어보는 거야? 실컷 말하긴 했는데..왠지 시시콜콜 말해버린 기분이라 민망한걸. … 그 배달부씨를 찾는다고? 흐음, 큰일이네. 하루 종일 부지런히 배달하니까 한 군데서 만나기가 쉽지 않거든. 배달부씨는 왜 만나려 하는 건데?
뭐, 위험할 때 도움을 받았다고?! 오, 그럼 보답하려고 찾아 온 거구나! 이런 말 하면 안 되겠지만, 좀 부러운걸~. 배달부씨의 멋진 모습을 봤을 거 아냐. 어땠어? 실제로 본 전투하는 모습! … 아잇, 비밀이라니 치사하네! 내 얘기는 전부 들었으면서… 배달부씨가 비밀이라고 했다고? 쳇, 하는 수 없지… 아, 나한테도 그런 행운이 찾아왔으면 좋겠네~ … 아니지, 내가 배달부씨를 구해주는 편이 조금 더 멋있으려나?
… 어라, 그냥 가는 거야? 얼마 안 있어서 편지가 올 텐데. 그 사람인지 보고 가는 게 어때? … 음,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배달부씨랑 잘 마주치길 빌어! 내 데이트 신청도 응원해 주고~!
흠흠, ‘고맙닷치’라니 특이한 말버릇을 가졌네. 다른 지방 사투리인가?
… 아, 배달부씨! 이번에는 배달부씨가 오셨네요! 기다리고 있었슴다. 아, 네. 오늘은 편지를 기다린 게 아니라 배달부씨를 기다린 건데.. 드릴 게 있어서요. 제가 뭘 준비했냐면요, ….어라? 아잇, 잠시만요! …응? 어어? 어디갔지? 분명 이 주머니에 … … 으, 으하핫, 아무것도 아님다! 저, 준비한 건 이… 이 도, 도시락인데요! 이 도시락으로 말할 것 같으면 제 여동생이 손수 싸 준 정성 가득한 도시락으로…
3,000자 + FFXIV 세계관 + 기본 마감 타입 작업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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